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닌의 난 (문단 편집) === 고료의 전투 === 1466년 12월, 소젠의 지원을 받고 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느닷없이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올라와서 교토 북쪽의 지장원에 진을 쳤다. 이듬해인 분쇼 2년 1월 2일(1467년 2월 6일), 소젠에게 설득당한 쇼군 요시마사는 관령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나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양해도 없이 요시나리를 고쇼로 불렀다. 이어서 요시마사는 마사나가가 관령 관아에서 매년 정월에 행하는 의식인 오나리를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는 요시마사가 마사나가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의 암시였고 결국 사흘뒤 요시마사는 소젠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서 요시나리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마사나가에게는 교토의 저택을 양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빡친 마사나가는 관령직을 사퇴했고 소젠은 낼름 자신의 파에 속한 시바 요시카도를 관령으로 임명해버렸다. 이리되자 소젠에게 권력이 급속도로 기울것을 우려한 카츠모토는 고쇼를 점거하고 요시마사에게 소젠토벌령을 내리게 하려 했으나 요시마사의 부인인 히노 도미코가 먼저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소젠에게 정보를 흘리면서 실패하고 만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린 소젠은 자신의 저택 근처의 동맹 슈고 다이묘들의 병력을 규합해 고쇼를 포위하고 '''카츠모토가 하려고 했던 일을 똑같이 하게 된다'''.(...) 소젠은 요시마사에게 카츠모토와 마사나가를 추방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요시마사는 카츠모토의 추방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다른 다이묘들이 중립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마사나가를 공격하는것은 동의했다.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마사나가는 수비하기가 어려운 자신의 저택을 불싸지른후 고료 신사로 병력을 이동해 전투에 대비했다. 한편 소젠은 덴노와 상황,황태자를 고쇼에 밀어넣은 뒤 마사나가를 쥐어패기 위해 일어났다. 요시마사는 '''이 싸움은 하타케야마 가문 싸움이니까 절대 다른 다이묘들은 끼어들면 안된다'''라고 명을 내렸으나 소젠편에 선 다이묘중에 이 명령을 '''지킨 다이묘는 없었다.'''(...) 반면 호소카와 카츠모토는 마사나가를 '''버렸다.'''(...) 이때문에 카츠모토는 전투를 피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결국 카츠모토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마사나가는 혼자서 요시나리와 소젠 등을 상대하다가 역부족이 되자 한밤중에 불을 지르고 자살한 것으로 위장해 도망쳤다. 결국 권력은 완전히 소젠에게로 넘어갔지만 희한하게도 카츠모토는 교토에 그대로 남아있었던것 뿐만 아니라 비상시국이라는 명분으로 관령이 하는 직무인 병력 소환이나 훈장 수여 등의 임무를 '''자기 편 다이묘들에게 시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